흥선대원군과 고종 둘 사이 안좋았나요?흥선대원군 납치 후 귀국 당시 고종이 맞이하러 가는
둘 사이 안좋았나요?흥선대원군 납치 후 귀국 당시 고종이 맞이하러 가는 것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는데안좋으면 무슨 사유로 안좋았나요
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종이 성인이 되어 친정을 선언한 이후부터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말씀하신 대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귀국할 때 고종이 마중조차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파탄 났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갈등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수렴청정)을 하며 10년간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세도정치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죠.
고종의 친정 선언: 고종이 성장하면서 직접 국정을 운영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냈습니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며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아들이 왕이 되었음에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고,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 쇄국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했죠.
고종과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 고종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은 점차 개방과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던 흥선대원군과는 달리, 고종은 나중에 척화비를 철거하고 서양 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등 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정치 노선의 차이가 부자간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을 때, 민씨 세력을 견제하려는 군인들과 백성들이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며 그를 다시 권좌로 복귀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재집권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끝나게 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를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권력에 재진입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는 일본과 손을 잡고 잠시 정권을 잡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에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이용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행보는 고종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부자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부자 관계였지만, 권력을 둘러싼 다툼과 정치 노선의 차이로 인해 평생에 걸쳐 대립했으며, 이는 조선 말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맞물려 비극적인 가족사로 이어지게 됩니다.